편집국 편집장 [CEOin PREMIUM=편집국 편집장]
“일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 기업은 사라진다”
업의 재정의부터 오너의 사고 전환까지…
한국 기업에 닥친 ‘일하는 방식 대전환’
출근·야근·보고는 전략이 아니다
AI 시대, 성과는 ‘사람 관리’가 아니라 ‘일의 구조 설계’에서 나온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이 문장은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다. 2026년 현재, 한국 기업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인재 부족도, 기술 격차도 아니다. ‘업(業)을 어떻게 정의하고, 일이 어떻게 흐르도록 설계돼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외면해왔다는 데 있다.
모든 기업 리더가 한 번쯤 고민해 봤을 질문이다. “우리 회사가 정말로 성과를 만들어내는 집단인가, 아니면 ‘일하는 척’만 잘하는 조직인가?” 2026년 현재, 일의 재정의(job redefinition)는 단순 HR 이슈가 아니다
누가(오너와 CEO가), 무엇을(업과 일의 구조를), 언제(지금), 왜(생산성 정체·AI 전환·인재 이탈 때문에), 어떻게(업의 재정의→조직 구조 개편→리더 사고 전환으로) 바꿔야 하는지, 이 기획은 그 해답을 추적한다. 경영의 화두가 됐다.
산업화 시대 기업의 ‘업’은 비교적 명확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싸게 만드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그래서 일은 세분화됐고, 시간은 통제됐다. 그러나 디지털·AI 시대로 넘어오면서 업의 본질은 급격히 바뀌었다. 이제 기업 가치는 노동량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과 의사결정 속도에서 창출된다.
경영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이미 수십 년 전 “지식근로자의 생산성은 시간 관리가 아니라 목표 명확성과 자율성에서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 통찰은 AI 시대에 더욱 현실이 됐다. 반복 업무의 상당 부분은 자동화가 가능해졌고, 인간의 역할은 판단·기획·창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맥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MGI)는 2024년 보고서에서 “사무·관리·분석업무의 60% 이상이 부분 자동화 가능하며, 이를 전제로 업무를 재설계한 기업은 평균 20~25%의 생산성 향상을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기술 도입이 아니라 업무 구성 요소(job task)의 재정의다.
전통적 일의 정의는 시간과 장소였다. 아침 출근, 정해진 근무시간, 회의, 보고서.
이는 산업화 시대 노동의 흔적이다. 그러나 최신 연구는 일의 본질이 행위가 아니라 성과(task outcome)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AI·자동화 환경에서는 반복적 수작업을 제거하고, 사람이 전략·창의·복잡문제 해결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업의 정의’다. 이 말은 단순히 도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일의 구성 요소(job task)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연구에 따르면 대규모 공공 기관에서 업무 구성 요소를 재정의해 효율성을 조정한 뒤, 전략적 활동의 비중은 크게 높아졌다.
과거엔 직무를 부여받으면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직무 자체가 재구성되고 재할당된다. 역할을 단순히 재택·출근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한국은 지난 10여 년간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거대한 제도 변화를 겪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011년 약 2,100시간에서 2023년 약 1,870시간 수준으로 200시간 이상 감소했다. 그러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여전히 미국의 약 60%, 독일의 65% 수준에 머문다.
이 괴리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시간을 줄였지만, 일의 구조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다단계 결재, 회의 중심 의사결정, 보고서 위주의 성과 관리가 유지되는 한, 근로시간 단축은 ‘압축 야근’과 ‘보이지 않는 초과근로’로 전환될 뿐이다.
한국 기업의 평균 결재 단계는 5~7단계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반면 글로벌 테크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는 2~3단계가 일반적이다. 구조 자체가 속도와 책임을 가르고 있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크로소프트 일본법인이다. 2019년 여름 한 달간 실시한 ‘주 4일 근무’ 실험에서 이 회사는 단순히 하루를 줄이지 않았다. 회의 시간을 절반 이하로 줄이고, 보고를 슬라이드 10장 이내로 제한하며, 의사결정 권한을 팀 단위로 위임했다. 그 결과 직원 1인당 매출이 약 40% 증가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근무일이 아니라 일의 설계가 성과를 바꾼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근로시간 실험도 마찬가지다. 2015~2019년 공공 부문 중심으로 약 2,500명이 참여한 이 실험에서, 근로시간을 35~36시간으로 줄이면서 동시에 불필요한 회의·중복 업무를 제거했다. 평가 결과는 명확했다. 생산성은 유지 또는 개선, 직원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비교적 선제적 모델로 평가된다. 네이버는 원격·오피스 선택권을 주는 동시에, 팀 단위 목표와 성과 지표를 명확히 묶는 구조를 설계했다. 핵심은 ‘재택이냐 출근이냐’가 아니라, 어떤 결과를 언제까지 내는 조직인가를 분명히 한 점이다.
반대로 실패 사례도 뚜렷하다. 야후는 2013년 원격근무를 전면 폐지하며 “함께 있어야 혁신이 나온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성과 관리와 협업 구조는 그대로였고, 결과적으로 핵심 인재 이탈과 조직 혼란이 가속화됐다. IBM 역시 원격근무의 선구자였지만, 오피스 복귀 정책을 반복적으로 수정하며 내부 혼선을 겪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업의 정의와 성과 기준을 바꾸지 않은 채, 물리적 통제만 강화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일하는 방식 혁신의 최대 저항선은 시스템이 아니라 리더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심리적 안전감 연구를 통해 “통제 중심 리더십은 단기 효율을 높일 수 있
으나, 장기 성과와 학습 능력은 급격히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조직은 오류 보고 빈도가 2배 이상 높지만, 장기 성과 지표는 오히려 우수했다.
그럼에도 많은 오너·CEO는 여전히 “눈에 보여야 일한다”는 산업화 시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AI 시대의 일은 보이지 않는 판단과 설계에서 가치가 만들어진다. 리더의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제도도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정책 방향도 전환이 필요하다. 근로시간 상한 규제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제도적 보완을 제안한다.
첫째, 산업·직무별 성과 중심 업무 설계 가이드라인을 정부 차원에서 제시해야 한다. KPI 예시, 회의·보고 기준, 초과근로 관리 모델을 표준화하면 기업의 실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둘째, 회의·결재·보고 축소를 생산성 지표로 관리하는 정책적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단순 근로시간 단축보다 구조 개편에 보상을 주는 방식이다.
셋째, 프랑스의 ‘연결 차단권’처럼 디지털 과로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 성과 중심 자율성이 무한 책임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일하는 방식의 재설계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업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 기업은, 사람을 아무리 바꿔도 성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바꿔야 할 것은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일이 흘러가는 구조다. 출근을 늘리면 혁신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은 이미 여러 차례 깨졌다. 반대로, 회의와 보고를 줄이고 성과를 명료하게 정의한 조직은 “덜 일해도 더 내는” 길을 증명했다.
정부는 실험 가능한 제도·가이드·인센티브로 판을 깔고, 기업은 결재·회의·평가·업무 자동화까지 ‘일의 설계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 이 재설계를 미루는 기업부터, 성과와 인재를 동시에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한국 기업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근무시간도, 더 강한 통제도 아니다. 업의 본질을 다시 묻고, 구조를 바꾸며, 오너와 리더의 사고를 전환하는 일이다. 이 변화를 먼저 시작한 기업만이 AI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지금 이 질문을 미루는 순간, 기업의 미래도 함께 미뤄진다.
이제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우리 회사는 시간을 관리하는가, 성과를 설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