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편집장 [CEOin PREMIUM=편집국 편집장]
COVER STORY
OFFICE FAMILY
부를 물려받은 사람들에서, 부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로
“할아버지는 회사를 세웠고, 아버지는 제국을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대한민국 재벌 1세에서 4세까지
돈 · 기업 · 가문 · 혼맥 · 상속, 그리고 ‘부의 자격’
삼성 · 현대자동차 · LG · SK · 롯데에서 세계의 로스차일드 · 월턴까지
기업은 어떻게 ‘가문’이 되고, 가문은 어떻게 ‘명문’이 되는가

세대를 이어 걷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 서는 기업이라는 건물 — OFFICE FAMILY의 출발점
돈을 상속하면 부자가 된다. 기업을 상속하면 경영자가 된다. 그러나 철학을 상속해야 비로소 ‘가문’이 된다.
한국 자본주의가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다. 한 세대가 회사를 세우고, 다음 세대가 기업집단으로 키웠으며, 이제 3세와 4세가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창업자의 시대가 저물면서 한국의 주요 기업에서 경영권 승계는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출근은 평범한 직장인의 출근과 조금 다르다. 누군가에게 회사는 월급을 받는 직장이지만, 누군가에게 회사는 할아버지가 창업하고 아버지가 키웠으며 자신이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할 ‘가문의 자산’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무실은 단순한 오피스가 아니다. 집안의 역사와 자본, 지분, 경영철학, 인맥, 평판, 책임이 한꺼번에 모이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것을 ‘오피스 패밀리(Office Family)’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불러볼 수 있다.하지만 오피스 패밀리는 단순한 ‘가족경영’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족(Family)이 기업(Office)을 만들고, 기업이 자산(Wealth)을 만들며, 그 자산이 다시 다음 세대의 교육·경험·네트워크·기회를 만드는 순환구조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21세기 오피스 패밀리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느냐가 아니라, 물려받은 부에 어떤 새로운 가치를 더하느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회사를 물려줬지만, 사회는 자격까지 물려주지 않았다”
한국 재계에서 지금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세대교체’다. 산업화 시대 창업주들의 자녀가 기업을 이어받던 2세 경영을 지나, 3세, 일부 기업에서는 4세까지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창업자의 질문이 비교적 명확했다. “어떻게 회사를 키울 것인가.” 후계자의 질문은 다르다. “왜 내가 이 회사를 경영해야 하는가.” 바로 여기에서 한국형 오피스 패밀리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5년 지정한 공시대상기업집단은 92개, 소속회사는 3301개였다. 이 가운데 자산총액 11조6000억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만 46개, 소속회사는 2093개에 달했다.
FACT BOX ① 2025년 대한민국 기업집단 현황 • 공시대상기업집단: 92개 / 소속회사 3,301개 •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자산총액 11조6000억원 이상): 46개 / 소속회사 2,093개 자료: 공정거래위원회 |
법적으로도 한국의 대기업집단은 독특한 개념이다. 공정위는 기업집단을 ‘동일인’, 즉 총수 또는 최상단 법인이 사실상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들의 집단으로 규정한다. 지분뿐 아니라 임원 선임과 주요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까지 지배력 판단에 포함한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가문’과 ‘기업’을 완전히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나 규모가 커
출처 중앙일보 기사 사진캡쳐화면질수록 기업은 더 이상 한 가족만의 경제적 공간일 수 없다. 주주가 있고, 수십만 명의 임직원이 있고, 협력업체와 소비자가 있으며, 국민연금 같은 기관투자자의 자본도 들어간다.
그래서 오피스 패밀리에는 근본적인 역설이 존재한다. 출발은 가족기업이었지만, 성장할수록 ‘사회적 기업’이 된다. 가족은 주식을 상속할 수 있다. 그러나 임직원의 존경까지 상속할 수는 없다. 경영권을 넘겨줄 수는 있어도 경영능력을 유언장에 적어 넘겨줄 수는 없다. 부모의 네트워크를 소개받을 수는 있지만 시장에서의 판단력까지 증여할 수는 없다.
재벌 3·4세에게 진짜 상속은 취임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다.
재벌가의 자녀는 무엇을 상속받는가
우리는 흔히 ‘상속’을 돈의 이동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부유한 가문에서 상속되는 것은 현금과 주식만이 아니다.
금융자본
주식, 부동산, 현금, 지분과 배당이다.
인적자본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 해외 경험, 언어 능력, 기업 현장을 경험할 가능성이다.
사회자본
부모 세대가 수십 년 동안 축적한 기업인·전문가·금융인·학계와의 관계망이다.
문화자본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정보를 중요하게 판단하는지를 어려서부터 관찰하며 배우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교육’이다.
평판자본(Reputation Capital)
유명한 성(姓)은 엄청난 자산이지만 동시에 부채다. 평범한 경영자의 실패는 한 개인의 실패로 끝날 수 있지만, 재벌가 후계자의 실패는 ‘○○가 3세의 실패’로 기록된다. 이것이 오피스 패밀리가 가진 특권과 부담의 양면성이다.

창업자에서 2세, 그리고 3·4세로 — 세대가 늘어날수록 승계는 좁은 문이 된다
월급보다 무서운 것은 ‘출발선’이었다
이 문제를 한국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더욱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난다.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한국 가구의 평균 자산은 5억6678만원, 평균 부채는 9534만원, 평균 순자산은 4억7144만원이었다. 2024년 평균 가구소득은 7427만원이었다.
FACT BOX ② 한국 가구의 평균 자산·소득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 평균 자산: 5억6,678만원 • 평균 부채: 9,534만원 • 평균 순자산: 4억7,144만원 • 2024년 평균 가구소득: 7,427만원 자료: 통계청·한국은행·금융감독원 가계금융복지조사 |
문제는 ‘평균’ 뒤에 숨어 있다. 최근 KDI 연구는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다소 완화된 반면 자산 불평등은 오히려 지속적으로 악화됐으며, 상위 25%의 자산점유 확대가 중요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부동산이 자산격차 확대의 핵심 요인으로 지목됐다. 단순히 집을 가졌느냐보다 수도권의 자산을 가지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분석이다.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게임 규칙이 변하고 있다는 의미다. 과거에는 ‘좋은 직장 → 높은 소득 → 저축 → 자산 형성’이라는 공식이 비교적 강했다. 그러나 자산가격이 소득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공식이 달라진다. ‘부모의 자산 → 자녀의 출발점 → 교육과 주거 → 투자기회 → 더 큰 자산’이라는 또 다른 회로가 만들어진다.
KDI는 오래전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을 연구하면서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소득에 영향을 주는 과정의 약 절반을 교육투자 경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동시에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이 증여와 상속을 통한 경제적 지위 대물림을 강화할 가능성도 지적했다.
따라서 오피스 패밀리는 재벌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가정이 크고 작은 형태의 ‘패밀리 자본’을 다음 세대로 이전하고 있다.

자산가격이 소득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에서는 ‘출발점’ 자체가 달라진다
OECD가 던진 질문, “부의 대물림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부의 상속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OECD에 따르면 27개 OECD 국가 평균으로 상위 10% 가구가 전체 가계자산의 절반을 보유하고, 상위 1%가 18%를 보유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상속이다. 16개 OECD 국가에서 하위 자산 20% 가구가 받은 평균 상속액은 약 300~1만1000달러 범위였지만, 상위 20%에서는 약 3만~52만6000달러였다.
FACT BOX ③ OECD 국가의 자산·상속 불평등 • 27개 OECD 국가 평균, 상위 10% 가구가 전체 가계자산의 약 50% 보유 • 상위 1% 가구가 전체 가계자산의 약 18% 보유 • 16개 OECD 국가, 하위 자산 20% 가구의 평균 상속액: 약 300~11,000달러 • 같은 조사, 상위 자산 20% 가구의 평균 상속액: 약 30,000~526,000달러 자료: OECD |
부자가 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더 많은 자산을 물려줄 가능성까지 가진다. 자본주의의 가장 어려운 질문이 여기서 나온다. ‘노력해서 부자가 되는 사회’와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자가 되는 사회’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OECD 역시 상속세가 기회의 평등을 높이고 부의 집중을 완화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가족기업 승계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과 자본의 비효율적 배분 문제를 동시에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더욱 민감하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이며, OECD 역시 2024년 한국경제보고서에서 이를 OECD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동시에 상속세가 경제력의 세대 간 고착을 완화하는 기능 역시 함께 평가했다.
FACT BOX ④ 한국의 상속세 • 최고세율 50% —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 자료: OECD, 「2024년 한국경제보고서」 |
그래서 상속세 논쟁의 본질 역시 단순히 ‘세율이 높으냐 낮으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업의 영속성과 기회의 공정성을 어떻게 동시에 확보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질문이어야 한다.
부자가 3대를 못 간다고? 이제는 ‘3대를 가야 진짜 가문’이다
동양에는 오래된 말이 있다. 부불삼대(富不三代). 부자는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의미다. 영어권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s.” 1대가 재산을 만들고, 2대가 유지하며, 3대가 소진한다는 경고다.
실제로 가족기업의 장수 자체가 쉽지 않다. HBR이 소개한 연구에서는 가족 소유·지배기업 가운데 2세대까지 살아남는 비율을 약 30%로 제시한다.
FACT BOX ⑤ 가족기업의 생존율 • 가족 소유·지배기업 중 2세대까지 생존하는 비율: 약 30% 자료: Harvard Business Review |
그런데 세계적인 명문 기업가문을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 유럽의 오래된 기업가문들은 단순히 돈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세대를 이어오지 않았다. 가족헌장, 지주회사, 재단, 신탁, 이사회, 전문경영인 제도 등을 통해 ‘가문의 재산’과 ‘기업의 경영’을 분리하는 장치를 발전시켰다. 누구나 자녀라는 이유로 CEO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와 경영의 자격을 별도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에르메스가 대표적이다. 에르메스는 1990년 주식합자회사(SCA·Société en Commandite par Actions) 구조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를 정체성과 문화, 장기 지속성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설명한다. 가족이 지배력을 유지하면서도 경영과 감독 기능을 제도적으로 분리해 장기 생존을 설계한 사례다.
미국의 월턴 가문 역시 월마트 창업 이후 세계적인 부를 형성했지만, 오늘날 월마트는 가족 구성원만으로 운영되는 회사가 아니다. 가족자본과 전문경영 체제가 공존한다.
여기에서 ‘명문가’와 단순한 ‘부잣집’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부잣집은 돈을 상속한다. 명문가는 시스템을 상속한다.

상속은 재산을 넘기는 일, 유산은 가치를 남기는 일 — 무게가 실리는 쪽이 다르다
한국의 재벌 1세가 물려준 것은 사실 ‘주식’만이 아니었다
한국 산업사를 되돌아보면, 창업 1세대가 후손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을 단순히 기업가치로만 평가하기 어렵다. 전쟁과 빈곤을 지나 산업 기반이 거의 없던 시대에 공장을 짓고 수출시장을 개척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철강, 화학, 유통, 전자 같은 산업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창업자의 시대에는 개척이 기업가정신이었다. 2세 시대에는 확장과 글로벌화가 과제였다. 그렇다면 3세와 4세의 과제는 무엇인가.
더 큰 빌딩을 갖는 것일까. 더 많은 계열사를 소유하는 것일까. 아니다. 새로운 세대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훨씬 어렵다. ‘상속받은 기업에 새로운 존재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AI, 반도체, 바이오, 로봇, 우주, 에너지 전환, 기후변화, 인구감소처럼 창업자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산업환경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계자는 할아버지의 성공방식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창업주의 정신은 계승하되 방법은 파괴해야 하는 역설을 안고 있다.
3세 경영의 가장 위험한 착각
오피스 패밀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기업을 물려받는 순간이 아니다. 기업이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할 권리를 갖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상장기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액주주가 있고 기관투자자가 있고 해외투자자가 있다. 임직원의 생계가 걸려 있으며, 협력업체에는 회사의 발주가 곧 생존과 연결된다.
따라서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오너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 큰 권한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이어야 한다. 최근 공정위 역시 가족 구성원이 미등기임원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해 권한과 책임의 괴리를 문제로 제기했다. 오피스 패밀리가 사회적 존경을 얻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지점이다.
기업의 DNA를 물려줄 것인가, 의자를 물려줄 것인가
좋은 승계와 나쁜 승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좋은 승계는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정신을 재현할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 기업가문에도 보다 강력한 ‘후계자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해외 유학이나 MBA 학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입사원과 같은 현장경험, 해외법인 근무, 손익 책임이 있는 사업운영, 실패 경험, 외부기업 근무, 이사회 검증 등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원칙 하나가 필요하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기회는 얻을 수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CEO가 될 수는 없다.
이 원칙이 정착될 때 재벌 승계는 ‘세습’에서 ‘계승’으로 이동한다.
OFFICE FAMILY 2.0 — 이제 부의 정의를 바꿀 시간
산업화 시대의 부는 소유였다.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큰 공장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가.
그러나 21세기의 부는 조금 다르다. 돈 + 지식 + 관계 + 평판 + 영향력 + 시간 + 선택권이다.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며, 더 높은 단계의 부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다.
기업가문 역시 마찬가지다. 1세대의 부가 축적의 부였다면, 2세대의 부는 확장의 부였고, 3·4세대가 증명해야 할 부는 사회적 가치의 부다.
얼마나 물려받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더 만들어냈는가. 얼마나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했는가.
기업가치를 얼마나 높였느냐뿐 아니라, 그 기업이 사회에서 왜 필요한가를 증명했는가. 이것이 새로운 평가기준이 되어야 한다.
출처 한국일보 가사화면 캡처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
많은 사람들이 명문가를 이야기하면 기부를 떠올린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명문가의 조건을 기부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부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가이다.
좋은 일자리, 정당한 납세, 협력업체와의 공정한 거래, 소액주주 보호, 혁신에 대한 투자, 인재 육성,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 그리고 기업가 자신이 사회문제 해결에 자본과 지식,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100억원을 벌어 1억원을 기부하는 것보다, 어떻게 100억원을 벌었는지를 묻는 시대가 오고 있다.
한국에도 ‘100년 기업가문’이 나올 수 있을까
이제 한국 자본주의도 중요한 시험대에 들어섰다. 산업화 1세대가 만든 기업들이 창업 반세기와 100년을 향해 가면서 ‘기업의 수명’과 ‘가문의 수명’이 동시에 시험받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가족이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다. 어느 가족이 가장 오랫동안 사회로부터 경영의 정당성을 인정받느냐다.
100년 기업을 만들려면 100년 동안 한 가족이 CEO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능력이 부족한 가족 구성원에게 경영을 맡기지 않을 수 있는 결단.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넘길 수 있는 용기. 잘못된 결정을 인정할 수 있는 문화. 가문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할 때 회사의 이익을 선택할 수 있는 원칙. 이것이 있어야 기업은 가문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아버지가 누구냐”에서 “당신은 무엇을 만들었느냐”로
앞으로 한국 재벌가의 3·4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누구의 아들인가.’ ‘누구의 딸인가.’ ‘얼마를 상속받았는가.’ 그 질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새로 만들었습니까.” 창업자의 손자는 창업자가 아니다. 하지만 다시 창업할 수는 있다. 기존 기업 안에서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조직문화를 만드는 ‘제2의 창업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재벌 3세’라는 표현 역시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상속자의 꼬리표가 아니라 혁신자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부의 마지막 단계는 ‘상속’이 아니라 ‘유산’이다
돈에는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소유자가 죽는 순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세계 최고의 부자도 자신의 재산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부는 무엇일까. 결국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부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라는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속(Inheritance)과 유산(Legacy)은 다르다. 상속은 재산을 넘기는 행위다. 유산은 가치를 남기는 행위다.
주식은 상속할 수 있다. 경영권도 승계할 수 있다. 건물도 물려줄 수 있다. 하지만 존경은 상속할 수 없다. 명예도 상속할 수 없다. 사회적 신뢰도 상속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 세대가 다시 벌어야 한다.
OFFICE FAMILY
아침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사로 출근한다. 누군가는 취업시험을 통과해 그 회사에 들어갔고, 누군가는 부모가 세운 회사로 출근한다. 출발선은 분명 다르다. 그 차이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좋은 가문은 자녀에게 편안한 인생을 보장하는 집안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집안이어야 한다. 기업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부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 그때 비로소 ‘재벌가’는 ‘명문가’로 진화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 역시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
부자는 돈을 남긴다. 기업가는 회사를 남긴다. 그러나 명문가는 원칙을 남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새롭게 정의해야 할 ‘오피스 패밀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뿌리가 깊을수록 나무는 오래 산다 — 100년 기업가문의 조건